
졸업
졸업식. 모두가 교정 여기저기에서 끝도 없이 사진을 찍느라 바쁜 시간에, 한 소녀는 건물 꼭대기 층의 3학년 B반 교실에 홀로 남아 그 활기참을 저 멀리 창 너머에서 차분히 보고 있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하늘이 푸르게 예쁜 날씨 좋은 날.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온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소녀의 어깨를 조금 넘긴 머리를 살짝 밀며 장난을 쳤다. 옅은 믹스커피를 닮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바람을 타며 얼굴을 간질이자, 소녀는 옆머리를 귀 뒤로 슬쩍 넘겼다.
“여기 있었네. 안 내려올 거야? 겐타랑 미츠히코, 아유미도 슬슬 다른 애들이랑 사진 찍는 거 끝날 걸. 사진 안 찍으려고?”
“찍을 거야.”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저에게 저렇게 편하게 말 거는 사람은 한 손에 다 꼽히고도 손가락이 남을뿐더러, 저런 말투와 목소리는 단 한 사람, 에도가와 코난밖에 없었다. 소녀, 하이바라 아이는 터벅터벅 다가와 제 옆에 서는 그를 살짝 곁눈질했다. 단추가 하나도 잠기지 않아 활짝 벌어진 교복 겉옷 안으로 흰 셔츠가 잔뜩 구김져있었다.
“그 상태로 사진 찍으려고? 뭘 했기에 옷이 그 모양이야? 단추 쟁탈전이라도 벌어졌어?”
“다 짐작하면서 굳이 물어보는 거야? 자, 봐봐. 내 가쿠란. 단추가 한 개도 없어. 덕분에 잠그지도 못한다고.”
“어차피 잘 잠그고 다니지도 않으면서.”
소녀는 턱을 괸 채로 고개만 살짝 꺾어서 소년의 가쿠란을 찬찬히 구경했다. 가위를 준비해서 섬세하게 떼어낼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역시 힘으로 거칠게 뜯어냈는지 단추가 달려있어야 할 부분이 너덜너덜했다. 소맷자락에 두어 개씩 달린 단추까지 알차게 남김없이 뜯겼네. 하긴, 그는 축구를 잘 한다던가, 또래 아이들 같지 않은 분위기라던가, 그럼에도 잘난 척 않고 친근하다던가, 무의식중에 베푸는 다정함이라던가… 하는 것들로 초등학교 때부터 쭉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한창 첫사랑을 시작할 무렵인 중학생이라면 격렬하게 쟁탈전을 벌여가면서까지 단추를 뜯는 거야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두 번째 단추는 누구에게 줬어?”
금방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리려는 소녀에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뺀 소년이 그대로 소녀의 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아무한테도 안 줬어, 아직은.”
“뭐?”
소년이 주먹을 돌려 손바닥을 펼치자, 학교 문양이 작게 새겨진 단추가 덩그러니 손바닥 위를 살짝 굴렀다. 덜그럭.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도 소녀는 그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아니, 그건 마음이 낸 소리였나? 단추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탁함 한 점 없이 오직 맑기만 한 푸른 눈이 선명하게, 오롯이 소녀만을 보고 있었다.
“당신… 이거, 의미를 알고 하는 거야?”
“그야 잘 모르지만, 소중한 사람한테 주는 거라길래 미리 빼뒀지. 그런 거라면 너 이외에 누구에게 주는데? 그러니까 받아 줘.”
소녀는 망설이다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머뭇머뭇 단추를 집어 올렸다. 그 과정에서 소년의 손과 소녀의 손이 살짝 맞닿았다 떨어졌다. 자신의 떨림이 전해졌을까, 소녀는 조금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저도 모르게 약간 인상을 썼다.
“…미리 빼돌려서까지 주는 성의를 봐서 받는 거야.”
“네, 네. 감사 합니다~”
소년이 다 안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홀가분한 얼굴을 보고 소녀도 아주 조금 웃었다. 하여간, 매번 나만 하나하나 안절부절 하지. 미소의 끄트머리가 조금 썼다. 그 애절한 씁쓸함을 삼켜 넘기며 소녀는 단추를 쥐었다. 조그만 단추가 손 안 가득했다. 그저 단추일 뿐인 물건이 의미를 하나 부여했다고 이렇게나 커다랗다니. 언제나 마음이라는 것은 기존의 물리 법칙 따위를 간단하게도 무너뜨려 놓는다. 그럼에도 그게 싫지만은 않은 것도 역시 마음의 탓일까.
소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시금 소년을 향했다. 소녀가 단추를 손에서 굴리는 동안 소년이 바로 옆에서 창가에 붙어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소녀가 보던 장면을 소년도 보는 것이다. 같은 광경을 두고 둘이 하는 생각은 닮았을까, 아니면 조금 달랐을까. 같지만 조금 다른, 그리고 다르지만 같은 선에 선 서로를 생각하며 소녀는 그가 할 생각을 조금 건너짚어 보았다.
두 번째 졸업이라고 어이없어 할까? 애늙은이처럼 좋을 때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 그것도 아니라면… 어떨까. 나는, 저 밝은 삶들을 보며 전부 하나같이 아름다운 청춘, 인생에 단 한 번 뿐일 빛나는 순간이라 부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약으로 인해서 다시금 몸의 시간을 돌려 이 순간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해도, 저들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채로 맞는 순백의 시간은 절대 될 수 없다. 나는 평생 저런 새하얀 순간은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녀는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같이 섭섭하고 부러워지고 마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것도, 지나친 바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예전이었다면 바라지도 못했을 일을 손에 넣어놓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더 소망해 버리다니, 사람의 욕심이란 얼마나 끝이 없는지. 예전 같았으면 그저 소년의 옆에서 파트너로서 함께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자신이, 이제는 더 큰 자리, 더 큰 의미를 소망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넘쳐흘러 꼴사나운 것을 알면서도 멈추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욕심과 마음은 서로 닮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아, 두 번째 중학교 졸업이라니. 초등학교 때도 기분 이상했지만 정말 이상해.”
“그래?”
“보통 단 한 번씩만 할 경험일 텐데 말이지. 그런데서 난 다르구나 하는 걸 실감해버린다고 할까.”
“그래서, 슬퍼? 후회 되?”
“그럴 리가. 그야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때에는 좀 슬프고 절망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지 않았으면 얻을 수 없었던 것들도 있어. 잃은 만큼 소중한 것이 생겼고 또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면 되니까 괜찮아.
말하자면 일종의 인생 리셋 버튼을 누른 거나 다름없잖아. 이것도 남들에게는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그러니까 같이 즐겁게 살기로 했잖아. 벌써부터 잊은 건 아니지, 하이바라?”
“안 잊었으니까 걱정 마. 그냥 물어 봤을 뿐이야.”
내가 당신과의 일을 잊을 리가 없잖아? 분해서 직접 말하지는 않을 거지만. 소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런 대답이 올 줄 알면서도 그 답을 듣고 싶어서 후회 되냐고 물어본 자신의 비겁함이 소녀는 우스웠다. 소년의 말은 소녀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둘에게 차이가 있다면 소년은 그렇게 정한 순간 정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소녀는 그렇게 정했음에도 가끔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 단지 그 차이였다.
그래서 소녀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불안해질 때마다 소년으로부터 자신의 말을 끌어내고는 했다. 지나가는 돌풍에 흔들릴 때마다 자신과 같은 입장의, 같은 생각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 소년이 곁에 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와 의지가 되곤 했는지. 그건 평생 말하지 않고 혼자만 소중히 간직할 사실이었다. 저 잘나신 탐정께서도 절대 이것만은 추리해 내지 못하리라.
“그럼 다행이고. 아, 그렇지. 하이바라, 너 고등학교 안 갈 생각이지? 원서는 넣은 모양이지만.”
“그건 어떻게 안 거야? 또 그 잘난 추리?”
“솔직하게 말하면 이번에는 추리는 아니고, 그냥?”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소년이 덧붙인 말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님에도 이상하게 소녀의 마음에 남아 메아리를 울렸다. 정말로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읽는 정도의 사이에 들어선 걸까. 내가 당신으로부터 나의 마음을 읽어내듯이, 당신도 나로부터 당신의 무언가를 보고 있을까. 마치 꼭 거울이나, 심연처럼. 그의 파트너는 세상에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소녀의 자부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가끔 이렇게 정말 두 사람의 관계가 마음에 확 와 닿을 때가 있곤 했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할 거야?”
“어머, 당신하고는 상관없잖아?”
“상관없다니…, 그건 섭섭한데. 게다가 실은 나도 고등학교는 가지 말까 생각하던 차고….”
소년이 말을 조금 흐리며 살짝 고민했다. 검지를 굽혀 턱 끝에 살짝 대고서 왼쪽 위를 응시하는 것. 어느 때부턴가 말을 고르는 때에 소년이 흔히 하는 버릇이었다. 생각한 그대로 툭툭 내뱉던 소년이 언제부터 말을 고르기도 할 줄 알게 되었나. 아마 내가 자꾸 핀잔을 주어서이겠지? 자신이 만든 버릇이라고 생각하니 소녀는 그 버릇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네가 지금까지 나를 따라와 주고 서포트 해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널 따라가서 서포트 해줘야지. 네가 내 파트너이듯이, 나도 네 파트너니까.”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며 신중히 골라 모은 말을 꺼낸 소년이 아예 몸을 돌려 창틀에 걸터앉아 몸을 기댔다. 검은 교복 뒤로 빛바랜 흰 커튼이 흔들거렸다. 커튼을 흔든 바람이 꽃잎 몇 장을 교실로 끌고 들어왔다. 나무에서 교실까지 온 꽃잎이 몇 장 안 되듯이, 소년이 한 말도 자신의 안에 담아둔 수많은 말 중에서 고르고 고른 극히 일부의 말이겠지. 극히 일부의 말임에도 이렇게나 의미 있다니, 그럼 그 전부는 대체 어떨까. 얼마나 크고, 선명할까. 소녀는 차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고 고생했잖아. 나도 이런데 오래전부터 조직과 연관되어있었던 너는 더했겠지.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고 즐기면서 살기만 해도 괜찮잖아. 나도 그렇고, 너는 더 그렇고.”
마주친 눈동자에 다정함이 가득했다. 소년은 늘 그랬다. 무의식중에 자꾸 다정함을 건넨다. 사람이 약한 순간에 달콤한 다정함으로 파고들어와, 사람을 퐁당 빠뜨려놓는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정말 최악의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최악의 사람.
“그 동안 못했던 것들,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네가 앞으로 전부 다 했으면 좋겠어.”
앞으로 뭘 하고 싶어? 소년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소녀가 답할 때까지는 더 말하지 않을 생각인지, 소년은 그저 답을 기다리며 팔짱을 끼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서포트.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동경하던 모든 것들, 그 모든 순간에 같이 걸으며 함께 있어준다는 의미의 말들. 소녀는 다시금 가슴이 벅차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다는 것, 미래에도 계속 함께 걸어간다는 것. 모든 약속의 의미가 그 말에 있었다. 오직 그 말만으로도 미래가 눈이 부셨다.
“…유학을 가보는 것도 좋을지도.”
“응. 가능하면 한 나라 말고 여러 나라 가보자.”
“여행을 가서 낯선 거리를 마음 편하게 걸어 다녀보고 싶어.”
“이젠 조직도 없으니까 얼마든지 머물 수도 있어. 유명한 관광지는 다 가볼까?”
“아예 세계 일주를 하는 거야.”
“질리도록 돌아다니겠네. 좋은데?”
“그렇지만 역시 아유미들이 그리울 테니 자주 일본에 와야겠어.”
“학기 중에 여행을 다니고 방학 때 돌아오면 되잖아? 방학 때는 애들이랑 국내여행도 좋고.”
“수학여행도 가보고 싶었어.”
“초등학교랑 중학교에서 갔잖아!”
“아이들, 다들 대학은 가려나. 한 번쯤 대학을 다녀보는 것도 재밌을지도 몰라.”
“흠, 그러네. 나도 대학은 가본 적 없으니까.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질리면 돌아와서 고등학교 졸업 인정 시험을 본 다음에 센터 시험까지 치지 뭐.”
“조기졸업 해 버릴 거지만.”
“자신만만하네. 그럼 그대로 대학원까지 가지 그래?”
“그건 패스. 옆에 있었던 대학원생은 진짜 대학원생의 삶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건 반박할 말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앞뒤 없이 마구 던진 말에 일일이 다정한 긍정이 돌아왔다. 이런 미래도, 저런 미래도. 그 어떤 미래도 옆에 소년이 있다고 생각하니 소녀는 전부 즐거울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다음 날 하루하루가 기대된 적이 있었을까. 그건, 역시 행복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한 거겠지. 그리고 소년이 함께 있는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행복은 어디가 최대치일까? 어느 정도가 내 행복의 최대 포화량일까? 그 답은, 어느 날에 알게 될까.
“연애도 해보고 싶어.”
“엇, 어…,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아?”
조금의 솔직함을 얹어 던진 말에, 소년이 조금 당혹스러워 했다. 당황해서는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 아, 역시. 조금 괴롭히고 싶어. 소녀는 오늘 처음으로 깊게 웃음 지었다.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짓궂은 남자아이의 마음을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서포트, 해준다며?”
“이건 서포트 할 영역이 아니잖아!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면 도와주긴 할게. 그런데 넌 어차피 그것도 필요 없다고 할 거 아냐.”
“필요 있어.”
“응?”
“계속 나랑 같이 있어줄 거라면서.”
“그런데?”
“그럼 당신 말고 누구랑 연애를 해?”
“어?”
“연애해보고 괜찮으면, 결혼도 할까.”
“하아??? 농담이지?”
“글쎄, 추리해 봐. 당신, 특기잖아?”
자꾸자꾸 웃음이 났다. 당황하는 소년의 얼굴도, 커지는 소년의 목소리도,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하나같이 전부 행복이었다. 아,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이 됐을까?
혼자서 외롭게 버티던 나날이 있었다. 평생 행복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있었다. 소녀는 지금 그 시절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분명 괜찮다고, 곧 혼자가 아니게 될 거라고. 네 하루하루가 봄볕처럼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이 될 거라고. 앞으로도 줄곧 함께 있어줄 보물 같은 사람이 생길 거라고.
소녀는 행복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직은 이런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이후에. 내가 조금 더 솔직하게 되고, 그가 조금 더 나를 의식하게 되는 그 때에. 보물 같은 나날, 그 중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날을 골라서, 이런 얼굴로 고백을 해야지. 내 기나긴 이야기와 마음을 전해야지.
그만 가자, 다들 기다리겠어.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세일러복의 팔랑거림, 그 뒤를 소년이 얼른 쫓아갔다. 소녀를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만이 남은 교실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뒤로 커튼만이 마치 소녀의 부푼 마음처럼 살랑살랑 흩날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