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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덕 시호신.png

보통의 하루

 

 

 

 

"피곤해... 건들지 마."

 

귀가 하자마자 침대로 직행, 연인 간 담소를 나눌 새도 없이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게 일상이 된 시호는 최근 모 기업 개발팀과의 프로젝트 업무로 매우 바쁘다. 늘 바쁜 애인 역할을 도맡아 하던 신이치였기에, 오랜만에 겪는 상대의 잦은 야근과 뚝뚝 끊기는 연락에 고전하는 중이다.

또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곧장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버린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며 얄밉고 사랑스런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는데, 그마저도 거부당하자 신이치의 입에서 결국 날선 말이 나갔다.

 

"오늘 나 보고 처음 하는 말이 그거야?"

"비꼬지 말아줄래, 오늘은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바빴으니까."

 

제가 말하고도 아차 싶었으나 이어지는 시호의 무심한 태도에 발끈한 신이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며 쏘아붙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서운했다.

 

"우리가 뭐 아직도 파트너 관계인 줄 아냐. 애인의 귀여운 투정으로 봐주면 어디 덧나?"

 

음. 귀여운 투정 절대 아니었으면서. 어쩐지 정신은 그대로고 몸만 늙어버린 것 같다. 해독약이 잘못됐던가. 남이 들으면 우습고 당사자가 들으면 욕할 상상들을 서슴없이 해버리는 시호였다.

엎드린 자세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 그를 바라봤다. 오늘은 기필코 세게 나가리라 다짐한 신이치의 마음은 게슴츠레 뜬 청록빛 눈에 또 다시 함락당한다. 하필 왜 저렇게 생겨서. 할 말을 잃은 듯 이어지는 침묵에 시호가 덤덤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전혀 안 귀여워."

"아 진짜 너..!"

"농담이야, 그 모습은 좀 귀엽네. 그렇지만 정말 안 돼. 미안하지만 단념하고 어서 자길 바라."

 

몇 초 단위로 병 주고 약 주는 그에게 그냥 웃어보여야 하나 더 투정을 부려봐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시호가 나른하게 웃으며 침대 옆을 툭툭 쳤다. 분명 쓸데없는 고민 말고 이리 오라는 손짓이다. 신이치는 잠시 갈등하다가 못 이기는 척 부러 한숨을 내쉬고는, 끝내 와락 끌어안으며 침대에 몸을 뉘였다.

도드라진 어깨뼈와 날개죽지가 제 품 안에서 자리를 잡느라 꿈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귀엽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귀엽다는 말을 시호에게 육성으로 하면 혼나므로 마음속에만 담아둬야 한다. 본인은 마음껏 하면서 저만 못 하는 게 억울하지만 아마 내가 너무 좋아서. 혹은 부끄러워서 그런가보다, 하며 멋대로 지레짐작 하는 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다. 물론 시호가 알면 욕할 상상이었다.

 

"나 따뜻해서 좋지."

"응. 그러게..."

 

말꼬리가 한없이 늘어지는 게 벌써 반 쯤 꿈나라인 것 같았다. 아, 조금만 더. 일부러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등을 토닥여 잠을 방해하며 끈질기게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다.

그거 마감 언제랬지? 다음 주 수요일. 수요일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어머, 지금 재촉하는 거야? 어. 완전. 쿠도 군 이렇게나 여유 없는 건 또 오랜만이네. 알면 계속 미안해 해. 미안하진 않은데... 너 정말 나 놀리는 맛에 살지? 푸흐. 네 눈 감은 얼굴만 며칠 째 보는 기분이야. 얼른 나랑 눈도 맞추고 입도 맞추자. 으, 하여간 저질이야. 그런 걸로 하지 뭐.

 

 

 

"미야노."

"......"

"미야노?"

"......"

 

시호. 외방향의 이름 부르기까지 다다르면 곧 시계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그의 긴 호흡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운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두운 방 안에서 새근거리는 시호의 얼굴만 전등 불빛에 아른거린다. 하루 중 신이치가 가장 아끼는 시간.

 

오랜만에 시호와 긴 대화를 나눠 기쁘면서도 미안했다. 그래도 번번이 마음 약해져서 포기하고 자도록 두다가 나름 몇 주만에 부린 욕심이었다. 마지막 관계가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아니, 관계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키스조차 못 한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딱히 엄청나게 조급하진 않았다. (누가 봐도 엄청 조급해보이긴 하지만,) 하루 빨리 시호와 밤이 깊도록 애정을 나누고, 또 사랑을 확인하고 싶지만. 이렇게 한동안은 먼저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끝맺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 바쁜 게 비단 네 탓인가. 윗선의 기대 탓이지. 아무리 늦춰지는 시호의 퇴근을 기다리고 무심한 시호의 태도에 서운해 해봤자, 잠든 그를 보며 사색에 잠기다보면 점차 얼마나 피곤하면 저러나 싶은 안쓰러운 마음이 그 모든 걸 뒤덮는다. 늘 결국엔 얼굴이라도 매일 볼 수 있는 게 어디야, 하고 마는 것이다.

다만 전에는 얼굴만 보다가 자려고 해도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해야 하는 점이 조금 까다로웠다. 그는 신이치가 잠결에 뒤척이는 소리에도 잘 깨곤 했었으니까. 그러나 그마저도 최근 들어선 너무 깊이 잠들어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다.

 

신이치는 측은한 마음에 괜히 그를 덮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어서 일 다 끝나고 너도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

 

곤히 잠든 그를 보다보면 신이치는 가끔 복잡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리면 어떡하지, 잠든 그의 얼굴은 낡은 기억 속 총을 맞은 그것과 똑같아서, 바보같지만 확신할 수 없어 금방이라도 그를 잃을 것 같은, 당장 흔들어 깨우고 그의 온기를 확인하고픈 그런 지겨운 불안감이다.

부서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이내 살포시 내려앉는다. 입술에 닿은 볼은 여전히 뜨겁고 생생하다. 새삼스러운 불안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안도감은 별안간 고마움으로 번진다. 고맙고 미안해. 내가 더 잘 할게.

 

"으음..."

"아, 깼어? 미안. 얼른 다시 자."

"정말 음흉하네... 자는 사람 얼굴에 뽀뽀나 하고. 고마운 건 그렇다 치고 당신은 매번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하여간."

 

뭐? 시호 너 진짜... 순간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진짜 뭐.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당황한 신이치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받아치는 시호였다. 자는 줄 알았는데 연기였다니. 속내를 들킨 기분에 갑자기 부끄럽고 억울했다.

 

신이치가 시호를 이기는 날은 없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당장 빠르게 표정을 굳히고 다 못 털어낸 서운함을 잔뜩 부풀려 쏟아내볼까 싶다가도.

 

"진짜... 아, 됐어. 잘 자."

 

눈은 꼭 감은 채 입꼬리만 슬그머니 올라가는 그 얼굴을 보면 또 애써 쌓은 표정은 금세 무너지고, 그를 따라 배시시 웃어버리는 신이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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