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해, 쉐리.”
차가운 총구가 쉐리의 뺨에 닿았다. 잘게 떨며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짙게 웃어보인 실버불렛이 총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 손에 들린 것에 놀라 뭐냐는 듯 저를 바라보는 청녹색 눈동자에 실버불렛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아포톡신 4869. 네가 만든 약이야.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네.
“이 총으로 네 머리를 뚫을까, 아니면 네가 스스로 약을 먹을래. 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넌 죽을테니까.”
그의 말에 쉐리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갔지만, 지켜보는 실버불렛의 얼굴엔 유쾌함이 차올랐다.
“..실버불렛.”
“난 참을성이 없어, 쉐리.”
가련할 정도로 떨리는 흰 손을 겨우 들어올려 실버불렛의 손에서 알약을 집은 쉐리가 진심이냐는 듯 실버불렛의 눈을 바라봤다. 어서, 삼켜.
쉐리의 손이 그녀의 입가로 향했다. 입 안에 약을 넣자마자 우악스럽게 실버불렛이 그녀의 턱을 쥐었다. 탁자에 미리 준비해놓았던 물병을 들어 그녀의 입에 억지로 물을 쏟아냈다. 약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실버불렛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안녕, 쉐리.”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진 쉐리를 바라보던 실버불렛은 곧 자리를 떠났다. 게임의 시작이었다.
-
초등학생 정도로 몸이 작아진 쉐리는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도망쳤다. 제 아무리 조직의 브레인이라는 실버불렛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
고통이 가시지 않은, 익숙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이끌어 무작정 도망간 곳은 베이커 가였다. 그나마 익숙한 곳이었다. 연구실과 집을 오가며 지나던 거리였고, 가끔 평범하게 친구들과 떠들며 걷는 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종종 봤던 거리였다.
늘상 지나다니던 거리 안 쪽 골목을 걷던 쉐리의 몸이 기울어졌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더니 엉망으로 그녀를 적셨다. 더 도망가야되는데. 며칠 동안 잠도 못자고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한 몸이 작아지기까지 해 체력이 거의 바닥이었다. 거기다 비까지 맞아 더 최악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멀어지는 의식의 틈으로 흰 가운이 보였다. 도망가야 해. 연구실에서, 이 현실에서. 쉐리의 무의식이 아우성쳤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눈은 떠지지 않았다. 이젠 한계였다.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 느꼈던 건 허기였다. 그 때문인지 육체는 깨어났어도 여전히 멍한 그녀의 의식의 문을 두드린 것은 고소한 스프의 향이었다.
“일어났니?”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던 흰 가운을 입은 노년의 남자가 쉐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 네.”
“..무슨 일 있었니? 집 앞에 갑자기 쓰러져 있어서 놀랐단다.”
“..아.”
“말하기 곤란하면 나중에 말해도 된단다. 일단은 몸에 열이 나니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구나. 스프를 끓였는데,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먹는게 좋으니까 괜찮다면 조금이라도 먹어보지 않겠니?”
감사합니다. 작게 웅얼거린 그녀의 말에 남자가 빙긋 웃었다. 조금만 기다리렴. 가족을 제외하고는 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관심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는 가져보지 못한 평범한 삶을 엿본 것 같았다.
남자는 쉐리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을 회복했음에도 돌아가라 말하지 않았다. 그 점이 신기했다. 제 뭘 믿고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설마 조직 사람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냥, 상냥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족도 아니고 생판 남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이 이상했다.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그게 남자의 성격이고 성향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자 고마움이 더 커졌다. 고마움이 커짐과 동시에 무서웠다. 만일 조직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게된다면, 남자까지도 위험했다.
남자가 자고 있는 틈에 빠져나가기로 결심하고 책상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니?
“..네?”
“널 찾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네가 따로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아.”
“괜찮다면,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떠니?”
“저를 믿으세요?”
그녀의 말에 남자가 넉살좋게 웃었다. 믿고 말고 할 것이 어딨니, 그냥 보면 알지. 그냥 보면 안다고? 쉐리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우선 이름부터 알아야겠지?”
“..이름, 없어요.”
조직의 쉐리, 미야노 시호는 그 날 죽었다. 입술을 짓이기는 쉐리를 가만히 보던 남자가 그럼, 하고 운을 띄웠다.
“하이바라 아이는 어떠냐?”
“..좋네요.”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이 군.”
“..저도요.”
“난 아가사 박사란다.”
잘 부탁드려요, 박사님. 그 말이 어찌나 어렵던지. 그녀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남자는 기분좋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도움으로 그녀는 꽤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쇼핑도 하고 가끔은 외식도 하고, 남자를 도와 집안일도 하며 책도 읽었다.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가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의 전조같아서 그녀는 늘 불안함에 떨어야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녀를 위로해주는 남자를 위해서라도 하이바라는 씩씩해야했다. 하이바라 아이로서, 남자의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애석하게도 하이바라 아이의 평화는 그녀의 예상대로 깨지고 말았다. 띵동-. 누구세요? 문을 열자 그녀가 가장 보고싶지 않았던 얼굴이 보였다. 실버불렛, 그였다.
“오랜 만이야, 꽤나 찾아다녔는데.”
“..누구세요?”
“시치미 떼는 거야? 이야, 연기 실력이 꽤 늘었네.”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지 말라고, 박사님이-.”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시린 청색의 눈동자가 빛났다. 몸을 움칠 떠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털어낸 그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곤 싱긋 웃었다. 보고싶었어, 쉐리.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계속 그렇게 모른 척 하면,”
죽일거야. 네가 아끼는 그 남자. 실버불렛의 말에 그 날처럼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실버불렛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보고싶었다는 건 진심이고.”
“..알았어.”
“벌써 알았어? 역시 똑똑해, 조직에서 자랑하는 천재 연구원 답네.”
그와 몇 분 대화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숨이 막혀왔다. 몇 번 심호흡을 한 하이바라는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가요.”
“어딜?”
“날 조직으로 데려가려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이상하네, 기억에 없는데.”
“..그럼 왜 온 거에요?”
“보고싶어서 왔다고 했잖아.”
내가 왜 보고싶었는데요. 당신이, 도대체 왜, 내가.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정말 그가 답을 할 것 같아서. 하이바라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곱게 휘었다. 내가 널 꽤 좋아하거든. 그의 말에 입꼬리를 비틀어올린 그녀가 날 죽이려 했으면서, 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네가 조직에 있는 게 싫었거든.”
“어줍잖은 말로 속이려하지 마시죠.”
“이런, 들켰어?”
별로 거짓말 할 생각도 없는 것 같은 그 모습에 하이바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볼 일 없으면 가시죠, 얼굴 보고싶지 않으니까. 솔직한 말에 그가 크게 웃었다.
“입 다물어, 지금 당장이라도 그 남자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면.”
이제야 그다웠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전부 망쳐버리는 것이 실버불렛이었다.
“원하는대로 하세요, 그럼.”
“나랑 같이 가자, 쉐리.”
“..결국 그거였어요?”
“내가 널 구원해줄게.”
“아니, 당신은 날 망칠 뿐이야.”
그녀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넌 정말 네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네가?”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삼일. 그 안에 다시 돌아와.”
제 말을 끝내버리곤 등을 돌린 실버불렛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한 동안 그가 떠난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던 하이바라의 몸이 무너졌다.
멀리서 쓰러지는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손에 들고있던 짐을 던지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응? 아픈게냐? 남자의 다급한 외침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남자에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어떤 무엇도.
-
삼일 내내 그녀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가 던진 의문이 결국 큰 파도를 일으켰다. 난 평범하게 살 수 없다. 나는 하이바라 아이가 아니라, 조직의 쉐리, 미야노 시호였으니까. 그 사실은 그녀가 외면하려하면 할수록 더욱 그녀의 목을 졸랐다.
살려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제 과오였다. 본 목적과 관계없이 탄생하고 만 독약, 그 약에 의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결국 그 독약을 먹고 작아진 자신. 하이바라는 스스로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돌아갈 수 밖에 없는가. 나는 절대 평범해질 수 없는가.
답은 그렇다였다.
하이바라는 남자가 사준 옷들 중 가장 아끼던 옷을 꺼내입었다.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 욕심은 내도 되지 않을까. 머리를 매만지고 남자의 앞으로 조심스레 걸어간 그녀는 남자의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박사님.”
“왜 그러니?”
“..저희 오늘 카레 만들어 먹을까요?”
“카레라, 좋지. 재료를 사와야겠구나.”
“같이 사러가요.”
그녀는 잠깐의 행복을 즐기기로 했다.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는 다정함을,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와 남자와 함께 카레를 만들어 먹은 하이바라는 평소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 남자가 준비한 과일을 먹었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박사님-.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그녀를 알고 있는 남자는 불안한 눈으로 하이바라를 응시했다. 왜 그러니? 그 다정함이 아파서, 그녀는 결국 눈물을 떨궈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고마웠어요.”
“..왜, 왜 인사를-.”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박사님.. 전, 이제 가봐야 해요.”
“..돌아가려는게냐.”
울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남자는 다정히 속삭였다. 가고싶지 않다면 안가도 된다. 이대로, 여기에서 나랑 같이 살아도 된다. 넌 선택할 수 있어.
“가야, 가야돼요. 저는, 저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요.”
저를 다정히 안아주던 품에서 벗어난 그녀는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남자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의 확고함이, 남자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갈게요, 박사님. ..건강하세요.”
“..너도, 너도 건강해야한다.”
작별이었다. 남자와, 그리고 하이바라 아이와.
-
“돌아왔구나, 쉐리.”
올 줄 알았어. 저를 반기는 얼굴을 무시한 그녀는 저를 끌어안는 품에서 몸부림쳤다. 놔, 놓으라고! 쯧, 혀를 찬 실버불렛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미안하지만, 어리광도 거기까지야.”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녹색의 눈이 사랑스러웠다. 실버불렛은 가만히 웃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쉐리, 날 너무 원망하지는 마. 난 그저 너에게 현실을 알려준 것 뿐이니까. 결정은, 네가 한 거야.”
“..알아.”
“너도 이제 확실히 알았겠지? 네가 있을 곳은 오직 여기뿐이야. 여기, 바로 내 옆자리.”
“..웃기지마, 당신이 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말에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 쉐리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늘었네. 웃음은 금새 사라졌다. 내가 못 할 거라 생각해? 실버불렛의 말에 그녀의 몸이 움칠 떨렸다.
“겁 먹긴, 내가 언제 널 죽인다고 했나?”
“..아니야?”
“오, 저런, 쉐리.”
가엾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피한 하이바라는 피곤하다는 말로 자리를 피했다. 결정은 네가 한거야. 넌 내 옆자리를 택한거라고.
“날, 죽이려고 했잖아? 왜 이러는거야?”
“그건 조직의 명령이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말했다. 웃기지도 않네. 당신은 내가 싫었던 거야. 그녀의 말에 그는 그럴지도 하며 웃었다.
“그 땐 네가 싫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쉐리.”
“이름, 부르지마.”
“그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
난 사랑에 빠진거야. 그가 아찔하게 웃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와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오지마.. 저리가..!”
“쉐리-.”
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실버불렛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위에 겹쳐졌다. 발버둥치는 그녀를 한 손으로 찍어누르고 그녀를 취했다.
“사랑해, 쉐리.”
하이바라 아이가 아닌 미야노 시호의 끝은 예상했던대로 지옥이었다. 그녀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다시금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치며 실버불렛이 웃었다.
사랑해, 쉐리.

